소싯적, 고시공부 핑계로
두 세달 씩 산사 선방을 찾아
방부에 든 적 있었지.
앉은뱅이 책상에 그럴싸하게
두꺼운 법전을 펼쳐 놓고,
가부좌 튼 다리 위엔
"쌍칼" 만화책을 뒤가 구려서
슬몃, 슬몃, 훔쳐보던 그 때,
찬 바람 풍경소리
문풍지가 몹시 울어
인기척도 몰랐는데
"착" "착" 등 줄기 치는
느닷없는 죽비 소리... 아파라! 정신 번쩍!
<처사 방을 빼던가, 머리를 깍던가. = 노승의 푸른 눈빛>
참 그래서 그렇게 나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백척간두 서슬 퍼런 창 끝에 외 발로 서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 극도(極道)에 이르려는 그런 스님!
운동권도 못들고 범부로 살며
딸,아들, 시집 장가 가더니 곁을 떠나고
문득, 외롭다는 생각,
도반들과 다시 찾은 그 산사엔
노승은 간데 없고
영산홍 가사 두른 범종루만 봄볕 쬐며 졸고 있다.
2023. 4. 23 안성 칠장사에서 - 여행문학 풀잎편지 백암 박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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