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편지

봄날이 갔다

백암 박용신 2023. 5. 2. 16:46

소싯적, 고시공부 핑계로 
두 세달 씩 산사 선방을 찾아
방부에 든 적 있었지.

앉은뱅이 책상에 그럴싸하게 
두꺼운 법전을 펼쳐 놓고, 
가부좌 튼 다리 위엔
"쌍칼" 만화책을 뒤가 구려서
슬몃, 슬몃,  훔쳐보던 그 때,

찬 바람 풍경소리
문풍지가 몹시 울어
인기척도 몰랐는데
"착" "착" 등 줄기 치는 
느닷없는 죽비 소리... 아파라! 정신 번쩍!

<처사 방을 빼던가, 머리를 깍던가. = 노승의 푸른 눈빛>

참 그래서 그렇게 나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백척간두 서슬 퍼런 창 끝에 외 발로 서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 극도(極道)에 이르려는 그런 스님!

 

운동권도 못들고 범부로 살며 

딸,아들, 시집 장가 가더니 곁을 떠나고 

문득, 외롭다는 생각,

도반들과 다시 찾은 그 산사엔

노승은 간데 없고 
영산홍 가사 두른 범종루만 봄볕 쬐며 졸고 있다.  

2023. 4. 23  안성 칠장사에서 - 여행문학 풀잎편지 백암 박용신

▲ 봄 날,햇살 비껴드는 법당에 쭈그려 앉아 법계사 도윤스님께 행복에 대해 넋 놓고 듣는 법문 한 자락, 그냥 그게 봄날에 청아한 행복이었다.
▲ 스님이 내어 주신 절 밥, 한 사발
▲ 법계사 모과꽃. 이렇게도 예쁜지 몰라, 참 미안했다.
▲ 칠장사 지킴이 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