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편지 54

봄날이 갔다

소싯적, 고시공부 핑계로 두 세달 씩 산사 선방을 찾아 방부에 든 적 있었지. 앉은뱅이 책상에 그럴싸하게 두꺼운 법전을 펼쳐 놓고, 가부좌 튼 다리 위엔 "쌍칼" 만화책을 뒤가 구려서 슬몃, 슬몃, 훔쳐보던 그 때, 찬 바람 풍경소리 문풍지가 몹시 울어 인기척도 몰랐는데 "착" "착" 등 줄기 치는 느닷없는 죽비 소리... 아파라! 정신 번쩍! 참 그래서 그렇게 나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백척간두 서슬 퍼런 창 끝에 외 발로 서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 극도(極道)에 이르려는 그런 스님! 운동권도 못들고 범부로 살며 딸,아들, 시집 장가 가더니 곁을 떠나고 문득, 외롭다는 생각, 도반들과 다시 찾은 그 산사엔 노승은 간데 없고 영산홍 가사 두른 범종루만 봄볕 쬐며 졸고 있다. 2023. 4. 23 안성..

풀잎편지 2023.05.02

1월의 시작에는/ 박용신

1월의 시작에는/ 백암 박용신 새벽 창가로 눈이 내린다. 싸라기눈이 사그락 살그락 내리더니 금새 솜사탕 같은 함박눈이 먼 산에도 지붕 위에도 그리고 장독대에도, 선잠 깬 가난한 농부 어깨 위에도 소복소복 푸짐하게 쌓여 갑자기 부자처럼 넉넉함으로 가슴이 따스해 온다. 스르르 목탄난로 주전자에 물 끓어 오르는 소리_ 일찍 먹이를 찾아 처마밑으로 날아든 콩새의 작은 입부빔, 문풍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소리_ 철교를 힘겹게 건너는 화물열차의 볼멘 기적_ 낮은 하늘로 묻어온 하느님의 기척소리_ 정갈하게 냉수 한 사발 받쳐들고 장독대로 가 두 손 모아 안녕을 기원 드리는 어머니의 나직한 주술 소리 까지_ 이렇듯 1월의 새벽은 작은 소리들에게서도 감사를 느끼며 잔잔한 행복 한 단을 흑단젓가락으로도 건져 올릴 것 같은..

풀잎편지 2023.01.01

개망초- 옛 풀잎 하나

개망초! / 박용신 참 해괴한 이름입니다. 이 풀이 밭에 무성하면 농사를 망친다고 지어진 이름이래요. 한 해 거른 게으른 농부의 밭에는 어김없이 희고 자잘한 꽃들이 촘촘히 자리잡고 바람결에 물결처럼 일렁이는데 뽑아 내고 뽑아 버려도 금새 다시 자라 꽃을 피우는, 이름은 개떡같으나 꽃이 예쁜 개망초. 가운데가 노랗고 꽃잎이 하얀_ 옛날에 어머니가 도시락 밑바닥에 혼자만 먹으라고 꽁보리밥으로 덮어 싸 주셨던 계란 후라이가 생각났습니다. 친구들에게 들킬까 봐 조금씩 조금씩 알겨 먹던 그맛, 북미에서 들어왔지만 이제는 우리꽃이 되어버린 개망초꽃, 요리 예쁜꽃을 뽑아 버리는 것이 안됐지만 조금은 농사꾼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개망초? 개망초? 개망인, 개망나니, 가 많은 세상, 으이그 지구를 떠..

풀잎편지 2022.08.23

애별리고(愛別離苦)-장마 / 박용신

애별리고(愛別離苦)-장마 / 박용신 꽃들이 지는 날, 나는 술을 마셨다. 꽃잎들은 언제나 면도날로 손목을 긋던 내 청춘의 고뇌처럼 술잔으로 떨어져 딸년의 초경같은 붉은 피를 뚝 뚝 흘렸다. 슬픔들이 술과 함께 목젖을 타고 가슴까지 닿았을 때 나는 보았다. 사형지로 유배되는 절창의 그리움들을_ 왜, 그리 술 맛이 쓰던지_ 나는 왜 빗물주렴 넘어 쓸쓸히 떠나가는 카인을 한 번쯤 가슴 내밀어 뜨겁게 안지 못했나_ 삭정이같은 차가운 손으로 의식적 사레만 쳤다. 듣는 이 없는 헛 말들을 허공에 주절 댔고 안주 대신 증오의 눈물을 삼켰다. 빗물 흐르는 유리창에 술 취한 육신이 무너지고 살 거죽으로 부스럼처럼 푸른 반점이 번져 오래된 해숫병자처럼 잔 기침을 했다. 빈 술잔 안으로 검은 밤이 무덤처럼 깊어 갈 때 목로..

풀잎편지 2022.08.21

다시 집으로 간다는 것-귀로

집으로 간다는 것_ 귀로/ 박용신 물고기가 산에 살고 나무가 바다에 산다면 물고기는 물을 버리고 산에 오를까? 나무는 산을 버리고 바다로 나아갈까? 결국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수 만번 꿈꾸고 시도 해 왔던 그 황홀한 자살도 넘실대는 파도 앞에 무릎을 꿇고, 처절한 패배의 용기만 확인 한 채, 소주 한 잔에 한치 회 한 점, 그렇게 동해바다를 한 입에 털어 넣고 나를 기다리는 일상들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깊게 깊게 침잠해 있던 권태가 넝마처럼 다시 빨래줄에 걸릴 것이고 희망이 보이던가? 욕망과 야망은 어떻게 다른가? 집으로 간다는 것. - 귀로. 그것은 휴식이다. 지친 탐미주의자의 안식이다. 욕망을, 야망을 잉태하기 위한 달콤한 결혼 첫날의 섹스이기도 하다. 어차피 관념일 수 밖에 ..

풀잎편지 2022.08.07

고래사냥-3신 (욕망에 대한 그리움)

욕망에 대한 그리움(동해바다 3신)/ 박용신 겨울이 시작되자 무작정 어딘가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왔다. 매일 같이 부대껴 동침을 하는 산이 아닌, 숲이 아닌, 권태로워질 때로 권태로워진 마른 코딱지 같은 일상을 하루 이틀쯤 벗어 오염만 되지 않는 다면 동해 바다쯤_ 그 푸른 짠물에 휘휘 헹구어 오징어처럼 말려서 목도를 하든 등짐을 지든 지칠 대로 지치게 끌고 와 몇 일 끙끙 이불 뒤집어 쓰고 꾀병을 앓다가 아내가 측은하게 달여 주는 보약 한 두첩, 못 이기는 척, "후후" 불어 마시며 호강을 하고 싶었다. 그리곤 어느 날, 툭툭 털고 일어나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는데_ 퉁퉁거리며 배를 몰고 방파제를 빠져나가는 어부의 이글거리는 두 눈, 시린 손 허리춤 전대에 끼고 열 마리 만원을 외치는 아낙의 처절..

풀잎편지 2022.08.03

여름날, 어머니의 통쾌한 꼬장-<며느리 밑씻개>

여름날, 어머니의 통쾌한 꼬장- 오래 전 ~ 어머니는 휴가철 맞아 모처럼 서울서 내려온 동생내외와 손주들을 위해 여름 내내 애써 키우신 옥수수 따고 감자 캐, 찌고 삶고 정신이 없으시다. 제수씨는 어머니 어쩌고, 애들 과외 때문에 제삿날 못 왔다고 아양, 핑계를 대며 얼마가 들었는지 봉투하나를 어머니 허리춤에 슬쩍 찔러 준다. 어머니는 "얘는 뭘 이런걸!" 뿌리치는 척, 손으로 어깨를 살짝 처 주시는 살가운 풍경. 제삿날, 생일날, 안 온다고 "내 이것들 내려오기만 해 봐라!" 벼르시던 어머니가 그새 넘어 가셨다. 어귀, 방범등이 불 밝히고, 매깨한 잉모초 모깃불 향이 마당 가득 퍼질 때쯤, 마당가 평상에 모여 앉아 모처럼 옥수수 감자 파티, "얘 들아 나와서 옥수수 먹어라. 우르르~ 옥수수 하나씩 집어..

풀잎편지 2022.07.30

고래사냥 ( 2신 동해, 바람부는 바다 )

고래 사냥 (동해, 바람부는 바다 2신) / 박용신 사실, 바람부는 날엔 바다에 가기가 싫지. 그물을 던져 봐야 알태는 다 빠져나가고 그놈의 성게만 두 서넛, 그물만 찟기우고 몇 날 몇 일을 기다린 고래는 결국 구경도 못했어. 어부는 값 비싼 고래 한 마리 잡는 게 소원이라고 그래서 그걸 비싸게 팔아 퉁퉁배 융자도 갚고 딸년 시집도 보내야 한다고 퉁퉁거리며 바다로 나아가다 도루묵 몇 마리 잡고 "예길 헐, 오늘도 또 틀린 게야!" 돌아오는 갑판 위, 애꿎은 우럭 한마리 씰기덩 씰기덩 몇 토막 썰어 "고시래! 옜다, 이건 너희나 먹어라." 갈매기에게 인심 쓰고 "크, 역시 경월이 최고 제_" 알싸한 깡소주 한 잔. "그참 이상한 일이여! 이렇게 촘촘한 어망을 그 덩치가 어떻게 빠져나가지?" 동해에는 고래가..

풀잎편지 2022.07.25

고래사냥(제1신 : 철렁 가슴을 베었다.)

철렁 가슴을 베었다 / 백암 박용신 입찰이 끝난 시멘트 바닥 임자를 못 만난 도루묵들이 날아서 하늘로 가려다 기진해 모로 눕는 항구의 아침, 한 잔 소주를 털어 우물우물 날 생선으로 허기를 때우는 기겁의 세월들이 비늘처럼 방파제에 번들대고, 늙은 어부의 구부린 등뼈 위로 소금끼에 겉 절은 일상이 파도에 부딪혀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그물에 갇힌 조각 난 바다는 햇살에 묶인 어선들 따라 줄래 줄래 수평선 넘어 하늘바다로 간다. "잡숴 보슈." 불쑥 내미는 뱃노의 날 생선 한 점. "그거 얼마 드림 되는데요?" "아니 돈 달라는 게 아니라. 허! 그 사람 참!" 철렁 가슴을 베었다. 아주 예리한 시선에_ (주문진항에서) 2004.12.4 풀잎편지(poolip.net)

풀잎편지 2022.07.24

(옛 풀잎 한 장) 꾀꼬리 편지

꾀꼬리 편지/ 박용신 모내기가 끝난 논에 모가 뿌리를 내리고 제법 푸르러진 벼포기가 이파리를 바람에 팔랑대고 백로들이 올챙이 잡아먹으러 논 고랑을 어슬렁거릴 때 쯤 이면, "얘,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면사무소에 들러 누에 알 좀 타 오렴" 어머니의 또 다른 생계꾸리기 사투가 시작된다. "누에치기" 누에치기는 춘궁기 농촌의 유일하게 현찰을 만질 수 있는 부업으로 누에가 고치를 잘 지어 공판장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 돈을 많이 받으면 그 동안 밀린 외상값이며, 월사금을 납부하고 읍내 장에서 쇠고기 근이나 사다 집안 식구들이 포식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민버루 밀밭가에 몇 십년 씩 자란 뽕나무에 몸빼를 입으시고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 치마폭 가득 뽕을 따시고 다레키 종뎅이 까지 채워 나를 부르시곤 했는데, 그렇게..

풀잎편지 2022.07.18